세 가지 색이 가지는 구조 1998

지금 침대 위에서 아내는 자고 있었다.
그때처럼 푸른 눈이 옆에 있다면 과연 저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애쓰는 법인데, 아내는 그런 것에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아내가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아니, 아니면 아내는 이런 점이 둔감 할런지 모른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을 내가 굳게 믿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아누운 아내의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가족들에게 변변한 유언 한마디 없이 즉사했다. 억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간선도로 중앙선을 넘어온 덤프트럭에 받쳐 차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했다. 시신을 거둔 응급구조대원의 말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라고 했고 가족들에게 조차도 보여주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뇌까린 소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죽었다.

남들이 즐기는 풍경

날이 밝자 누가 뭐랄 거 없이 모두 정씨네 가게로 모여들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자서 눈더부리가 민둥산처럼 부어오른 김노인, 이번이 마지막 농사라고 목돈 만들어 읍내로 이사하겠다던 구이장, 논이라곤 두 마지기뿐이고 나머지는 인삼을 해 먹어도 그저 우리 마을 잘되게 해달라고 빌던 턱주가리 영감 그리고 여기에 영문도 모르는 채 끼여든 벙어리 장씨가 있었다.

신북 가는 길

나는 앞차에 바싹 붙이려고 액셀레이터를 슬며시 밟았다. 그때 여자는 이상했다. 검문하는 경찰이 다가올수록 미니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리는 듯한 행동을 했다. 경찰이 차 앞으로 온다면 여자의 속옷은 확연히 들어올 것만 같았다. 옆에 있던 나도 여자의 드러나 하얀 허벅지를 아니 조금 과장되게 눈에 분홍빛 속옷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경찰이 손을 들어 차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얼마만큼 달렸을 거다.

두 개의 꿈

―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라.
마치 내가 환자인 거 같았다.
죽어가는 환자는 눈을 뎅그렇게 뜨고 시사주간지를 읽고 있었고 간병하러 온 나는 잠에 곯아떨어져 해가 진지도 몰랐다.
나는 병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가 하지 말라던 담배피우기를 서 있는 자리에서 거푸 세대나 해치웠다.

나그네의 길

재현은 죽음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태균이 형의 침착하면서도 목이 잠기는 듯한 말소리 또한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재현이가 죽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서로 소원해진 관계지만, 한때는 재현이가 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할 만큼 소중한 친구였다.

모 래 톱

목격자가 나 혼자라는 것도 못내 부담스러웠다.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맡고 있는 것 같다. 내 말 한마디에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선고형량을 내리고 있었다. 징역 1년, 2년, 3년, - - - 무기징역.

고독 그리고 기나긴 시간

“우리 이별을 하고 나면 어떡하지?”
그땐 정말 말하지 말았어야 할 걸 괜히 말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일절 한마디도 없었고 무거운 침묵만이 호숫가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동요의 빛도 움직임도 나타내질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지독히도 매서운 바람이 파도를 가르며 나에게로 불어닥치고 있었고 허공에 나는 새는 춤을 추듯 제자리를 잃었다.

1. 세 가지 색이 가지는 구조 1998
2. 그래서 나는 죽었다
3. 남들이 즐기는 풍경
4. 신북가는 길
5. 두 개의 꿈
- 첫 번째 꿈
- 두 번째 꿈
6. 나그네의 길
7. 모래톱
8. 고독 그리고 기나긴 시간